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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휴일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 두 사람은 정오가 다 되어 가도록 침대 시트 안에서 함께 미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잘 말려 햇살 냄새가 묻어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지척에 와 있는 연인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가 옆에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심장이 뻐근해 질만큼 충족되는 기분을 만끽하다 다시 잠을 청하고. 지극히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일찍이 눈을 뜬 코로네로가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을 제법 오랜 시간동안 내려다본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를 비밀이다. 그는 이 고요하고 오롯한 시간을 좋아했으므로 일부러 이른 기상을 계획하곤 했다. 새벽 여명의 어슴푸레함 아래서도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내 사랑. 닫힌 눈꺼풀과 뻗은 콧날, 가끔 잠투정하듯 우물거리는 입술. 껴안아 등허리를 토닥여주면 가만히 안겨 얼굴을 파묻는 모양새는 작은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귀여워서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곤 했다. 랄, 어디의 누가 너를 그저 견딜 수 있을까? 자문의 해답은 이미 도출된 지 오래였다. 결 좋은 머리칼이 가슴팍을 간질이면 마음 구석도 함께 간질거렸다.
내리감은 속눈썹 위로 가만히 엄지손가락을 얹은 뒤 연인의 볼을 조심스럽게 감싼 코로네로가 그녀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 맞췄다. 삽시간에 벅차오르는 정애로움. 동시에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법칙과 규범은 무의미한 것이 되곤 했다. 한 사람을 위해 재정비되는 삶은 경이롭고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이었다. 사랑이 버거울 수 있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목 아래가 조여들곤 했으니까. 존재만으로도 숨통을 틀어쥐는 찬란, 쌓아 올린 체계를 허무는 당신.
언젠가 자그마한 인기척에도 기민하게 굴던 시절의 감각이 남아있어 살갗 위를 쓸어내자마자 번쩍 뜨이던 날랜 눈빛을 기억한다. 지금이야 둘이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해졌다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별안간 정강이를 얻어맞았던 순간이 떠오른 탓에 희미하게 웃은 그는 사랑의 눈썹뼈를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매만졌다. 미간을 살짝 좁히는 정도야 날아오는 발길질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아니, 동일 선상에 놓을 수도 없지. 떠올린 기억과 더불어 눈앞에 마주한 그녀를 내려다보던 코로네로가 번지는 미소를 참을 여력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는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도 있나."
"그보다는 깨어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가 있지."
랄의 말을 풀이하자면, 네놈이 밤새 괴롭힌 탓에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또 건드리냐는 뜻이다. 장난기를 머금은 채 냉큼 대답한 코로네로의 가슴팍 위로 가볍게 주먹을 내리친 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졸음이 묻어나는 눈가 위로 두어 번 입 맞춘 그가 코끝을 부비자 연인은 못 이기겠다는 듯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랄이 말을 이었다.
"잠 좀 자자, 인마. 누구 때문에 피곤하니까."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더 자고, 일어나서 또 봐야지."
콤스빈의 교관 시절부터 진하게 묻어났던 말버릇이 잠기운에 섞여 어물어물 들려 왔다. 코로네로 또한 당시에 그녀의 어투를 옮아 왔고, 아직까지도 말끝마다 그 버릇이 녹아있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하잖아. 어디선가 들은 말을 떠올리던 그는 살짝 가려진 얼굴이 아쉬워 실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주었다. 아, 잠에 취한 랄은 보고 또 봐도 너무 귀여워.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못 이긴 코로네로가 퍽 아쉽다는 듯 금세 닫힌 눈꺼풀 위로 입 맞췄다. 힘 빠진 손이 어깨를 밀어내는 것은 잠깐 논외로 쳤다. 덕분에 좀 더 깊은 골을 그린 랄의 미간 위를 손끝으로 살살 문질러 달래는 연인의 목소리가 유난히 나직했다.
"이제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푹 자."
"약속 지켜. 걷어차여서 울기 싫으면."
"차인다니, 남편한테 너무 가혹하네."
결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런 간지러운 호칭에 적응하기 힘겨워하는 랄을 알고 있었다.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뺨이 뜨거워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어서, 그녀는 눈을 매섭게 치켜뜬 채 주먹을 날렸다. 조금은 진심이 담겨 있었으므로 안 봐도 유효타였다. 아야야. 맞을 짓을 한 남편의 신음성 따윈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함께 덮었던 이불을 팩하니 채간 랄이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으나 하얀 이불에 돌돌 감긴 몸, 와중에 다 감기진 못해서 드러난 어깨와 보이지는 않지만 잔뜩 성난 얼굴이 다 그려지는 탓에 코로네로의 눈가가 얄쌍하게 휘어졌다.
"랄."
"……."
"화났어?"
"……."
"알았어, 약속. 이젠 정말 안 놀려. 그러니까 이리 와."
묵묵부답. 랄은 영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인다. 돌아누운 사랑의 얼굴이 그리운 것은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으며, 구태여 그녀에게 자존심을 세우거나 이기려 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사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랄의 저기압엔 자신의 기여도가 구십 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아무튼. 코로네로는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간다는 마음으로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얀 이불에 감긴 등과 가슴팍이 맞닿았다. 내 신부 얼굴 좀 보자. 품에 꼭꼭 채워 넣은 채 귓바퀴 위로 속닥거린 탓에 말의 온도가 전염 당한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잔뜩 붉어진 귓바퀴에 입술을 눌러 붙인 그가 연인의 이름을 나긋하게 불렀다.
"랄, 얼굴 좀 보여 줘. 보여 주세요. 보여 주십시오."
마지막 맺음은 적당히 장난스럽게. 덕분에 어이없다는 듯, 연인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반쯤은 마음이 풀렸다는 소린데. 해석을 마친 코로네로가 그녀의 몸을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랄은 열기가 덜 식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잠은 완벽히 깬 모양이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시선을 교환하고, 먼저 정적을 깬 것은 그녀 쪽이었다.
"신참내기 기질은 어디 안 갔군."
"어?"
"예전부터 싹수 노란 건 알아줬어야 했는데 말이야, 교관을 졸졸 따라다니는 신참 군인."
"그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야."
이거 한 방 먹었는데. 화난 게 아니었나? 코로네로가 곤란한 듯 슬쩍 웃었다. 교관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아하니 콤스빈에서 첫눈에 반한 뒤로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일을 상기하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자 민망해진 코로네로가 연인의 눈동자 위로 살며시 손을 덮었다. 지금은 랄과 연을 맺고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반려가 되었으나,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그녀의 마음을 살피는 법도 헤아리지 못하고 직진할 줄만 알았으니 그에게 있어서 당시 일화를 듣는다는 것은 제법 부끄러운 일이었다. 대차게 거절당하며 싸늘한 눈빛을 받고, 사랑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매몰찬 이야기를 듣곤 했었지……. 복잡미묘해진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교관님은 덮어낸 손바닥 아래서 열심히 눈을 깜박이는 중이었다. 긴 속눈썹이 피부를 스치고, 눈꺼풀의 움직임이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교관님은 첫눈에 반했던 날보다 더 멋있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더 사랑스러워졌고요."
"못 하는 말이 없어."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 없습니다."
"……."
"가끔은……, 이렇게 함께인 지금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아르꼬발레노의 숙명과 서로를 잃어야만 했던 날이 분분하게 스쳤다. 낮아진 목소리를 가만가만 듣던 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음에서 부활한 소감이라면, 그래. 자신이 없는 미래에서 혼자 긴 시간을 감내했을 제 사랑의 속이 가장 신경 쓰였다. 마르고 비틀어지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선뜩했다. 무엇도 나를 약하게 만들 수 없으나 다름 아닌 네 아픔이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내게 유일하고 무해하며 애처로운 당신. 멀리 돌아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너는 꼭 행복해야만, 그래야만 했다…….
가렸던 손을 거두며 랄의 얼굴을 차근히 더듬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자가 정인의 생김새를 가늠하듯 절박한 심정이었다. 코로네로 스스로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랐다. 혼란함과 애틋함이 뒤섞여 떨리기까지 하는 손길을, 그녀는 그저 내버려 두었다. 이러니 네가 신참 소릴 못 벗어나는 거라고. 이 어리숙한 제자를 교육할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했다.
"우리는 현실이야, 멍청아. 나를 봐."
옷깃을 바투 당겨 쥔 랄이 분명하게 발음했다. 우리를, 현실을, 와닿은 순간을 직시하라고.
일순간 코끝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벽안의 아래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우주를 닮은 홍채, 그 속에서 파도치듯 일렁이는 수많은 감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간파하는 연인의 얼굴은 결연하고 강인했다. 코로네로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무엇보다 올곧은 눈을 한, 현실감 넘치는 사람이자 사랑이었다. 다듬지 않고 투박하게 발음한 문장만으로도 단번에 가치의 상대성 따위를 깨부순 채 홀로 절대적인 우위를 선점한 당신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랄은 인내심을 발휘할 줄 알았고, 코로네로는 주어진 진리에 수긍할 줄 알았다. 유능한 제자는 스승을 기다리게 하는 법을 몰랐다. 그러므로 먼저 입을 연 것은 깨우친 제자의 몫이었다.
"꿈이 아니야."
"그래, 꿈이 아니다."
"응."
"이런 것도 가르쳐야 하는 거냐?"
"아니. 이제 잘 알았어."
나는 당신의 목에 두 팔과 앞으로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걸고 그대로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랄을 와락 끌어안은 코로네로가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에 입술을 찍었다. 많이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갑작스레 쏟아낸 고백에 얼굴 붉히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한 소리 날아왔을 것도 같은 대사였으나, 오늘의 랄은 품 안에서 잠깐 바르작거리다 얼굴을 묻어버렸으므로 그는 한숨 같은 탄성을 내뱉으며 이 애정을 포옹으로 치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안긴 연인과 발끝에서부터 가득 채워지는 온기. 그녀의 성함은 발음하고자 혀에 얹으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성질을 가졌다. 아쉬움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내내 불러야지, 다른 도리가 있나. 코로네로에게는 천 번을 되새겨도 늘 새로울 것이었다. 고른 숨을 내뱉는 사랑의 등허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긴 새벽이 지나면 드디어 아침이었다. 어느새 잠든 연인들은 휴일을 보내는 방법을 착실히 이행하며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 어깨와 목덜미 위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었다. 아침 공기마저 다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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