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님(@10_10_tbk)께 넣은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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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과 사월의 경계, 흐드러지게 핀 목련과 벚꽃은 캠퍼스의 봄을 알리는 첫 타자였다. 정문을 지나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이는 체육대학관과 생기 넘치는 잔디 구장에선 축구 공을 몰며 내달리는 학생들이 계절의 활기를 몸소 표현하는 중이었다. 들어오는 길목부터 이어지던 꽃의 행렬은 분수대를 끼고 있는 외국어대학관을 거치고, 아름다운 외관으로 유명한 음악대학관을 지나 후문까지도 전부 연분홍과 상앗빛으로 화사하게 물들어 그곳을 지나가는 모두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봄과 싱그러움, 학생들이 거니는 캠퍼스 라니. 이게 미의 낭만이었다구요. 학교에 갓 입성한 신입생 삐약이 1인 프랑은 배부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정작 봄의 정취가 가득 담긴 캠퍼스는 거닐지도 못한 채 연습실에 처박혀서 밤새우는 것은 기본이고 통한의 쓰리 샷 아아메를 삼켜내며 콩나물 대가리를 닮은 음표를 헤아려야 했다. 음악대학관이 아름다운 것은 음대생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뭐 해, 미는 종일 방음 벽지가 붙여진 연습실 안에만 있단 말이에요. 개구리 후드 집업을 뒤집어쓴 채 드럼 세트 앞에서 종일 킥을 밟고 스네어를 두드리는 프랑의 얼굴이 생기 없게 가라앉았다.
"벨 선배, 음대는 다 이런가요. 다 선배처럼 칙칙하고 타락해서 고여버린 대학생뿐인가요."
"망할 개구리, 조용히 해. 집중이 안 되잖아."
한 손으로는 드럼 스틱을 돌리고 다른 손으로는 스틱의 끝을 겨누어 자신의 팔꿈치를 꾹꾹 찌르는 프랑에게 쏘아붙인 벨이 기타 줄을 겨우 짚었다. 잘생겼는데 머리도 좋고, 기타도 잘 치지만 선배는 인성이 잘못됐어요.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젖혔다. 종일 드럼 세트 앞에 앉아있던 탓에 몸이 결렸다.
벨을 내버려 둔 채 연습실의 문손잡이를 잡아 돌린 프랑은 반대편 손잡이에 달랑달랑 걸려 있는 선물 봉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봉투의 발신인을 찾았으나 발신은커녕 수신인도 아리송했다. 누구한테 온 거지? 프랑은 눈을 깜박이다가 그대로 손잡이에 봉투를 걸어둔 채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코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A가 아쉬움에 이를 가는 것도 모르고.
자판기에 동전을 밀어 넣은 뒤 좋아하는 알로에 음료의 버튼을 누른 프랑은 미동 없는 기계를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은 것을 보니 이건 아무래도……, 동전을 먹은 모양이다. 차라리 돈을 넣기 전에 소름이 돋으면 좋았을걸. 프랑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괜찮다면 이거 마셔."
"마음은 고맙지만 콜라를 마시면 취해버려서요. 죄송합니다."
그런 체질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너였냐! 타이밍은 좋았으나 뽑기 운이 좋지 않았던 B도 장렬히 실패. 프랑은 자판기가 고장 났을 경우에는 어디다 연락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이나 했다. 연습실 문을 열고 얼굴만 슬쩍 내밀어 무드따윈 전혀 없는 광경을 관전한 벨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녀석이 에타를 점령한 '초록 머리 걔'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초록 머리 걔'가 누구냐. 바로 축제 공연 당시 일 분짜리 드럼 솔로 하나만으로 에타를 휩쓸고 학교의 유명인사가 된 프랑이었다. 건조하지만 잘생긴 얼굴과 살짝 상기된 뺨, 단추를 두어 개 풀어둔 셔츠는 화젯거리 중 화젯거리였다. 스틱 묘기를 선보이며 옅게 웃었던 것이 축제 이후에도 계속 회자되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 축제 공연이 있던 날은 블랙 수트를 빼 입은 것에 반해 평상시엔 개구리 후드를 즐겨 입는다는 갭 차이도 유명했다. 혹자는 그의 패션 센스가 난해하다고 지적했으나 애시당초 프랑은 나도는 소문 따위에 관심이 없었으며, 알았다고 한들 그 후드를 선물해준 벨의 센스가 별로라는 사실을 선선히 수긍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속 편한 인물이었다는 소리다.
어쨌든 그 유명하신 초록 머리의 프랑은 눈치라곤 못 챙기는 타입이었다. 주변의 모든 학우들이 통탄할 만큼. 퍼거슨 감독님 말씀 따라서 인생의 낭비도 안 했다. 페X스X? 인X타? 할 줄도 몰랐고 열 줄도 몰랐다. 신입생 단톡방도 겨우 찾아 들어갈 정도로 아날로그 감성 물씬 풍기는 애였다. 한번은 답답한 마음에 벨이 짜증을 좀 부리자 튀어나온 대답이라고는,
"음대생이 음악만 잘하면 됐죠, 뭐."
프랑 특유의 느긋하고 무던한 말투가 사람을 더 열 받게 했으므로 벨은 참지 않고 기타를 조율할 때 쓰는 튜닝기를 그 애 머리에다 냅다 던졌었다. 그렇다고 프랑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음악대학 역대 최고 득점자로 실기 점수를 갈아치우며 입학한 뒤 학교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으니까. 이러나저러나 프랑은 에타를 뒤집어 놓을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자판기가 돈을 먹어버려서 음료수도 더 마실 수 없고, 그렇다고 통한의 쓰리 샷 아아메를 더 마시기엔 제 위장이 받쳐줄 것 같지가 않았다. 프랑은 연습실로 되돌아와 거의 바닥을 드러낸 1.5L 깡생수를 탈탈 털어 들이키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할머니가 입학만 하면 연애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바보냐? 대학보단 네 문제다."
"인생에 핑크빛 기회가 없네요, 기회가."
누가 들으면 뒷목 잡고 넘어갈 소릴. 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뒤 깍지 낀 두 손을 뒷머리에 붙였다. 오늘만 해도 두 차례, 기회란 기회는 족족 걷어차는 중이면서. 이 정도면 축구 동아리에서 모셔갈 스트라이커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풀죽은 프랑을 달래주거나 좀 더 세심하게 주변을 살펴보라는 등의 충고를 해 줄 생각은 일절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후배가 퍽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고생 좀 해야지, 어쩌겠어?
"뭐야. 선배, 왜 그렇게 웃어요. 기분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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