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Finger Point Hand With Heart 88
  • 쓰르라미가 우는 여름
  • 2021. 6. 27. 02:17
  • 세죽님(@M00N_MUUN)께 넣은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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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르라미가 우는 여름이었다. 귀가 물에 풍덩 빠진 듯 유독 먹먹한 오후, 노을이 어른어른하게 지는 시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에는 집집마다 피워 올린 향의 연기가 엷은 커튼처럼 흔들거리고, 능소화가 주렁주렁 매달린 담장마다 가지며 무에 다리를 달아 만든 말과 소 인형이 걸렸다. 오봉,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길 믿는 명절. 올해도 빠짐없이 돌아온 명절에 이치고는 숨을 들이마시었다. 마을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망자의 평온과 재회를 바라는 염원이 향내로 자욱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눈이 피곤한 숫자네.”

    마을에는 드문 숫자로 망자가 드리워져 있다. 집집마다 이름 모를 혼은 산자를 달랜다. 울지 마, 내가 여기에 있었어.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워. 눈물의 냄새를 맡으며 달래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술렁인다. 나긋나긋하게 귓가에 스미는 애정 어린 슬픔. 사람의 염이 깃든 것은 눈을 채갈 듯 강렬하고, 늪에 빠지듯 질척하다. 타인을 향한 마음이 섞인다면 그건 거짓말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해서 찰나처럼 이루어지는 재회, 짧게 반짝이는 기적의 날. 이치고는 산자가 눈치 챌 수 없는 사소하고 흔한 기적을 바라보다 눈을 돌린다.

    이치고는 가지와 무로 만든 인형이 들리지 않은 빈손을 짤막하게 쥐었다 편다. 천천히 향으로 이루어진 염원을 뿌리치듯 걸으며 강으로 향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차렸던 일이지만, 이치고의 어머니는 오봉에 돌아온 적이 없다. 그리고 올해도 오지 못했다. 어릴 적에는 자신이 보기 싫어서일까 서운했고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치고는 오봉마다 말과 소 인형을 만드는 가족을 말리지 않았다. 인간은 가끔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남은 자를 위해 제를 행해야 했다. 끝도 없이 내리는 비를 피하도록 우산을 펼치는 일, 그것이 남은 이가 살아가기 위해 하는 제사였으므로. 하늘이 어두웠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우산을 챙겨올 걸 그랬나.”

    이치고가 목 뒤를 쓸며 걸음을 재촉한다. 길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 그 애가 있었다. 수많은 갈림길 사이의 변곡점. 비를 그치게 만드는….

    “루키아.”
    “아, 이치고.”

    펜스에 기댄 채로 흐르는 강을 바라보던 루키아가 몸을 돌렸다. 제 각자 사람들의 염원이 짙어 어지러운 시야, 가장 절박했던 염원의 주인이 보랏빛 눈동자를 하고 서있다. 바람이 웅성거린다. 보리밭이 푸르게 파도치는 것처럼 마음이 출렁인다. 짙은 노을빛이 머리칼의 끄트머리에 물들어 있었다.

    “뭐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냐?”
    “쿠니이치가 고급 인절미를 줘서 먹고 있었어. 혼자 먹을 생각은 아니었고, …네 몫도 남겨놨으니까 걱정마라.”
    “됐어, 너 혼자 먹어라.”

    정말? 그러면 사양 않고 먹는다? 그렇게 말하며 루키아가 웃었다, 노을에도 숨겨지지 않는 상기된 뺨을 하고 한껏 웃어 보이는 모습이 제법 제 또래의 아이 같았다. 루키아는 어른스럽고 기품 있는 모습을 하다가도, 귀여운 인형이나 말랑말랑한 떡 같은 것에 뺨을 붉히고 웃었다. 마음의 무른 한 구석을 따끔하게 찌르는 웃음이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마음에 파고들어 한껏 삶을 파헤치고도 어느 날 훌쩍 떠날 수 있는 녀석이지. 눈꺼풀 속에 상흔을 새겨놓고, 잊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없으면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잊어버리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뺨에 인절미 가루 묻었다.”
    “아? 부, 부끄러운 꼴을.”

    너는 나의 상실인 동시에, 상처의 치유였는데.

    루키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제 입술을 털었다. 보슬보슬한 인절미 가루가 바닥으로 추락하고도 입술에 남아있었다. “어이… 이치고, 이제 깔끔하게 털렸어?” 루키아가 묻는다. 이치고는 빤히 루키아를 내려다 본다. 흘러내린 머리칼, 노을을 등지고도 붉은빛이 물든 피부. 자기보다 몇 뼘은 작은 키와 모든 것을 압도하던 드높은 긍지.

    누군가가 너를 별에 비유했던가, 인정한다. 루키아. 너는 내 인생의 가장 급변하는 변곡점이고 높은 곳의 길잡이별이다.

    “칠칠맞긴 아직 덜 털렸어.”

    평온을 가정하며 비어있는 왼손 엄지로 조심스레 입술을 문지른다. 조금 까슬까슬한 입술의 피부와 말랑하게 눌리는 살점이 심장을 조인다. 이름 모를 감정이 요동친다. 짙은 빛깔로 끊임없이 파도치다 끝내 둑을 무너뜨리고 손쓸 도리 없이 쏟아지는 색깔들. 커다란 강줄기 위의 종이배처럼 이치고는 무력하게 침잠한다. 이 색깔에 감정의 이름을 붙이면 너무나도 눈이 시린 이름을 갖게 될까.

    “됐냐? 이제 다 털렸어?”

    루키아가 묻는다, 이치고는 “그래.” 대답하고는 가만히 루키아를 바라본다.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길에 루키아는 조금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일 있어?” 루키아가 물었다. 입술을 떼는 순간, 이름붙이지 못한 모든 감정들이 언어로 형상화 된 채 추락할 것만 같아서 이치고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휘감는 감정들은 소용돌이치며 뇌를 저미는 충동이 된다.

    “루키아….”

    불현 듯, 정제되지 않은 충동이 속삭인다. 어머니의 일을 잊었어, 이치고? 떠나가고 나면 말하지 못한 것들은 그대로 심장에 고인 채 썩어나갈 뿐이야. 말하지 않는다면 떠나간 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멀어지게 돼. 그렇다면 루키아.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가장 간절하게 떠올리는 것은.

    또 다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노을의 품에 안기듯 이치고는 몸을 숙인다. 햇빛이 짙고도 붉어, 그늘에 몸을 숨기듯 루키아의 품에 이치고는 몸을 욱여넣었다. 가까워지는 숨결, 조금씩 녹아드는 미적지근한 온기. 툭, 손에 들린 물건이 추락하는 소리. 오렌지 빛의 입맞춤. 상실한 모든 것들이 돌아온다는 날, 유일하게도 되찾은 상실에 입을 맞췄다. 조심스러운 움직임 탓이었을까 루키아는 바짝 굳어 움직이지를 못했다. 코끝엔 가물가물한 향내가 난다. 죽음에 가까운 향기다. 향의 연기 너머로 넘어갈 것만 같은 존재를 이치고는 제법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풋풋하다기보다는 절박함에 가까운 형태다. 가지 마, 루키아. 또 사라지지 마. 루키아는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거부하지 않고 그 마음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이치고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낸다. 흐리게 한숨이 토해진다.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짧은 찰나가 지나고, 강이 한 뼘 넘게 흘러갔을 때 루키아는 입을 열었다.

    “…불안해하지 마, 이치고. 나는 여기 있으니까.”

    “…알아.”
    “거짓말. 이치고 네 거짓말이 얼마나 서투른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 아니야.”

    정말로, 오늘만. 오늘까지만 불안해하고 더는 불안해하지 않도록 할게. 이치고는 중얼거린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처럼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품을 파고드는 스스로가 어색했다. 루키아가 한껏 비웃을까. 너 답지 않다고. 그러나 루키아는 이치고를 어색한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모든 상실은 흔적을 남긴다. 잃어버렸던 것이 돌아오더라도, 돌아오지 않더라도 새살은 차오르고 그곳엔 화상 자국이 희고도 어색하게 남아 오래오래 상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상실을 반복하며 회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면 더 강해진다면 상처입지 않을 수 있을까.

    여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길잡이별을 올려다보며 어른이 되고 싶다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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